또다시 찾아온 광주의 5월
37년 강산이 선어보는 바퀴 시간이다
우리에게 5.18의 기억은 어떤 것일까?
나라를 지키라는 군인이지
국민한테 천벌을 물이잖아
실탄을 560벌로 받았다
우리 아들이 여기서 죽었어
죽지 않을 만큼 여기서 두드러 맞았습니다
구탈했다고 하면 전 대통령이 광주에 내려가서 구탈했습니까 그 사람들을?
그럼 내가 내소위를 꾸욱 죽여야 내 가슴이 터지겠는데
못 죽인 게서 막 이렇게 환이 돼요
그렇죠 진상 기밍이 안 되고 진실한 사과도 안 됐고 솔직히
폭동이라 매도되던 5.18은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기념된다
전두환 신군부의 한관 역사의 현장으로 우리는 기억한다
그러나 5.18 그 진실의 퍼질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국립 5.18 민주 묘지를 가던 길에 만난 한 택시 운전사
그래도 광주 항쟁에 참여했다고 한다
한창 이야기를 하던 중 그는 풀지 못한 의혹을 꺼냈다
지금도 내가 알기로는 시체가 지금 당시 5.18 때 경찰 군인 시민으로 합체하고 176명에 나왔는데
지금 무연고다 많이 있잖아요 입고 그 외에 지금 더 있을 거예요
못 찾아서 그렇지
시체를 쓰레기차로 치려다가 안 면양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양심 고백을 해야 돼요
그가 전환 이야기에 진실은 무엇일까
5.18 민주 묘지에서 만난 이익은 내 어머니
아들은 80년 5월 27일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지 못했다
고등학교 몇 학년이였어요?
졸업했지요
그때 고등학교 졸업했다고?
네 졸업했어요
학원에 가서는 그려버렸어요
재수하라고
내가 그때 혼자 버려서 일곱 숙고 못 살 것입니다
그래서 1년 막 꾸르라
1년 막 꾸르면 내가 몇 년에 로고 찍었더니
너 보니까 이렇게 걱정하지 말고
1년 막 꾸르라 그려놓고
그러면 오답을 내가 그 대신 맞춰줄게
그래서 실크 아이사스 남방하고
모지기 검정 바지하고
다음 세 구두에다가 회색 줄쳐졌어요
그거다가 한 번 내가 맞춰줬는데
그럼 입고 나가서는 없어졌어요
마지막까지 도총에 있었다는 이야기만 들렸다
아들이 게형군 총에 맞았다는 소식에
도총으로 달려갔지만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온 천지를 다 다녔어요 나는
이것도 없어가지고
어서 6월만 나오고 어서 뭐 됐다 하면
그하고 또 군인이 강안도 군인이 아가지고
회장한테 자기도 사람 죽였대
군대가 보술 부대가 있었는데
사람 죽였나서 내가 가서 죽은 자리를
이 식구를 묻은데 내 소요는 묻었다 그러고
그거를 가자와 함께 따라갔어요
이제 회장에 그걸 가서 어디 자리냐
여기도 안 묻었는지 다 파다 옹계부르고
없어요 자리도
21년 만인 2001년에야 아들을 찾았다
망활동 구음유욕에 있는 무용고자 묘를
새로 조성된 묘욕으로 옹기는 과정에서
DNA 검사로 찾게 된 것이다
아들의 시신을 찾아 전국을 헤매고 다니 세월이 21년
그 모진 세월 속에 어머니는 병이 들었다
가슴엔 풀지 못한 하은이 가득하다
머리가에 돌아오라고 정신가에까지
20여간이 있었어요
아이고 내가 징그럽소 징그러
내가 이놈 땀을 해요
고생 고생 말도 못하고 그때 보통 병 잃고
찾은 것이 하나 심장 병에다가
잃고 암수수를 내가 두 번을 했어요
5.18 희생자 중에는 아직 시신을 찾지 못한
이들이 많다
누구의 묘가 아닌 령이라 이름 붙여진 묘비들이
그것이다
가족들은 뼈 한 조각이라도 나오길
37년째 기다리고 있다
이창현 5.18 당시 겨우 7살이었다
내가 억울한 곳은 무슨 억울이냐면
국민들이 막 입학해놓고 1학년짜리
그건 문제있다고 애원승력 청상으로 딱 나와 있어요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기록만 확인했을 뿐
지금까지 어린 아들의 죽음을 찾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가슴에 묻을 수가 없다
37년이 지났지만
햄불자들이 어디에 붙여있는지 모르잖아요
6월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잖아요
어딘가 묻혀 있을 그 희생자들
이 사람들을 찾아내는 작업
그러기 위해서는 그때 당시의 계엄분들이
어디다 안 매작을 했는지 어디다 버렸는지
이걸 진실되게 밝혀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광주 광역시가 지금까지 인정한 행방 불명자는
81명이다
그러나 5.18 당시 행방 불명자로 알려진 이유는 더 많다
그들은 아직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5.18의 이 비극은 누가 책임져야 할까
지난 4월 5.18 피해자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전두환! 나와라!
수많은 사람들을 했으라고
아직도 밟고 책임을 전혀 없다고
잘 때문에 하고
전두환 그가 쓴 회고록 때문이다
지난 4월 회고록을 출간한 전두환
자신도 5.18 피해자라며
5.18 민주화 운동을 광주 사태로
펴마했다
발포 명령 부인하지
학살 명령, 양민 학살도 부인하고 있더라
그 회고록에 보니까
초등학교 학생들을 저준 사격은 학살만양도 부인해요
헬리콥터의 발포, 이사하시도 부인하지
광주 당시 시민들의 명예를
자노하게 집밥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전두환, 그가 가리고 싶은 광주의 진실은 무엇일까?
광주에 투입됐던 개흥군의 증언은 다르다
이경남 목사는 11공수 여단 병사로
광주왕쟁 현장에 있었다
그는 개흥군 중 유일하게 5.18 현장을 기록해
99년 당대 비평에 기고했다
광주 개흥군으로서 첫 양신고백이었다
19.15에 광주 시내 전역에서 한 2천 명 정도
특정 서부는 풀어져서
진짜 무지막지하게 주둘격 뺐어요 시민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난폭하게 행동했어요
근데 당시 지예관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그러죠
전두환 씨나 이희성 씨 같은 사람은
군인들이 괜히 그렇게 했느냐
다 학생들이 원위를 제공해 주니까
그렇게 이렇게 자기들을 합리화 시키는데
싫은 그렇지 않았어요
5월 18일 광주에 공수부대가 투입됐다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 시민들을 향해
무자비한 폭력이 자행됐다
그건 분명 국민을 수호해야 할 군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13대 14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상용 씨
그는 광주왕쟁 시민군이었다
광주 세무사 앞에서 목격한 충격적인 광경이
그를 시위대열에 소개했다
일반적으로 시위대열이 좋겠죠
엄청나게 구타당하고 끌려가고 하는 것을
여기에서 처음 목격을 했습니다
적진에 들어가서 적군을 격파하는
그러시고 진압 작전을 다쳤거든요
관에서 함께 이렇게 운집해서
보러 있는 개원분들을
이렇게 이제 무슨 일인가 보고 있게 된 것이냐
그런데 이제 누다도 없이
군인 몇 명이 오더니 그냥 이유도 없이
제 맥살을 잡고 끄집어내서
이 도로에 그냥 끄집어 나가면서
오카팔로 전쟁이를 차버리고
괴 끓듯이 아주 짐승 끓듯이
질질질 끓고 나가서 총 개머리팜
진압 본봉 죽지 않을 만큼
여기서 두드러 맞았습니다
군인들은 왜 그토록 폭력적이었을까
박재인 대통령 시위대군 하서부터
대폭력 3말동화에서 군생활이라는 것이
아주 긴장의 연속, 두려움의 연속
고달품의 연속이었어요
분풍이 한 거에 시켜봐라
군인들이요 그냥 몇 달을 그렇게 그냥
긴장 깨워내서 살다가
광주 시내에 나가서 군인들이
시위대가 저항하는 모습 보고
투석하는 모습 보고
군인들이 그 잠재되어 있던 분노가 폭팔된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문자력이 때린 거고
잔인하게 그렇게 시민들을 학대한 겁니다
다 미국의 전기관 학교에 도전한
전기관 학교에 도전한
전기관 학교에 도전한
전기관 학교에 도전한
한국의 전기관 학교에 도전한
전기관 학교에 도전한
전기관 학교에 도전한
전기관 학교에 도전한
전기관 학교에 도전한
전기관 학교에 도전한
전기관 학교에 도전한
東 Jaw assunto 뼈는
배제 부담을 하 roast
ethics
2.  imagen
이건
데미지
그 같은 느낌의 상 them
폭륙 진압에 분노한 시민의 물결은 더욱 컷해졌다
5월 21일 시민과 개원군의 경렬한 충돌 속에 집단 발포가 일어났다
그날 현장에 있던 김 공유 씨는 대열매인 앞줄에 서 있었다
느닷없이 그냥 총성이 울리더니 옆에서 두 사람이 총을 막고 이렇게
쓰러져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그 상황에서 저는
난 중에 한 것이면 아마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아요 시민을 향한 집단 발포 누구의 명령이었을까
1989년 5.18 진상 규명을 위한 청문회
전두환이 증원대에 섰다 자유권 발동도 가능하다는 겸사령부의 작전지침이
2개 동의 기회가 될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1980년 건조 진압 상황이 담긴 군대의 부기로 보구수협 한자로 적은 글씨 전카카
즉 전두환이 자유권 발동을 강조를 지시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자유권 발동을 강조한 것은 전두환 그였다
자유권에 대해서 소탄 계획을 어떻게 할 것이냐 이것들을 서로 얘기했다는 것이죠
거기에서 전두환은 초병에 대해서 도발시엔 안동시에 자유권을 발동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이 입수한 미국 비밀문서에도 전두환 그가 지목되고 있다
미국 국방정보국에 있는 80년 6월 자료를 보아도 실질적으로 전두환이
그 계엄군을 움직이는 저종자이라는 그런 표현도 있습니다
그게 보면은
5월 21일 이후 계엄군은 대량 살성 무기로 무장한다
도총 분수대 앞에서 그 장갑차에서 금남노노총에서 푸쇼하게 캐리버고고로 사격을 했습니다
캐리버고는 기본적으로 사격하는데 사람을 싱그릴수 있어요 다 도망가지
그래서 금남노노총장로 쪽으로도 통통 비게 되고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되고
5.18 시나 5.15쯤 되니까 부대태각하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5월 21일 광주 무동산에 있으면서
헬리컵터가 와서 낙하선으로 음식을 떨이켜주고 실단을 떨이켜주기
실탄 560벌받았어요 1인당
그게 전투지금 양이에요 실전에 취입될 때 지급받는 실탄의 그런 숫자입니다
그말부터 신군부는 시민들을 상대로 완전한 전투 테스트를 갖췄다
37년 동안 응폐대표 헬기 사격에 진실이 밝혀졌다
금남노 전일빌딩 내부에서 발견된 수백개의 탄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시결과 공중에서 사격한 총탄으로 확인됐다
실제로 헬기 기총 사격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육군본부의 헬기 작전 계획에 담긴 문서도 최근 공개됐다
헬기에서 사격 제압하라는 지침 전투안의 거짓말이 들통났다
헬기에서 사격한 전투안의 거짓말이 들통났다
이건 그런 건 아니죠 예를 들어서 주난마을 학살 작전 같은 경우
뭐 저수지에서 놀고 있는 초등학생들한테 청지를 해야 될 거나 주변 마을을
갔다가 완전히 덮쳐가지고 복수를 해야 됐죠 그냥
일반 민간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라서
광주황쟁이 일어났던 열흘 동안 곳곳에서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끔찍한 학살이 벌어졌다
주난마을에서는 5월 23일 하루 사이에 세 차례의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승합차 총격 미니버스 집중사격 그리고 부상자를 사살해서 안 매장하는
만행까지 자유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날의 진성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24살 청년 장재철 씨도 주난마을 학살이 있던 바로 그날 사망했다
주난마을이 그때 백돌 공장 있었어요 그가 근데 백돌 공장 있는데 갔는데
그 주난마을 바로 산에 거기에서 봉수 부대들이 숨어있다가 쌓아버렸어
총을 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신종철 씨도 5월 23일 개엄군 총탄에 사망했다
마을 통장이던 그는 주민들을 챙기다 변을 당했다고 한다
하순으로 넘어가는 학생들이 무지하게 많았었어요
뒷산에 있다가 크다 막 지저대인이고 불학사람들이 나아가지고 구경을 하니까
아저씨 말이 오염하니까 들어가십시오 손짓을 했습니다
저는 안 봤는데 불학사람들이 보고는
저번에서 보고는 직접 막 들어도 해버렸죠
그래가지고 신체를 어떻게 할 도리 없을 때 불학사람들이 뛰고 오는데
얼마나 총을 지저대인가 몰라요
전두환의 기억과 달리 5월 광주에선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수많은 살상 행위가 일어났다
이런 잔혹 행위에 대한 정부의 진상조사는 2007년 처음 실시된다
하지만 주남마을의 미니버스 총격사건 한 것만을 조사하는데 그쳤고
이마저 일부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진상 규명은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은 자신도 5.18의 피해자라고 강변하고 있다
1997년 대부분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전두환 8개월 만에 특별 사면으로 흘려났다
저도 생활이라는 게 여러분들은 겨도 속 가지 마시오
그러고만 내가 얘기하고 싶습니다
참여는 없었다
그럼 내가 내 소위를 꾸욱 죽여야 내 가슴이 터지겠는데 못 죽인 게 아니고 한이 돼요
내 새끼를 마치는 못 죽일 만큼 칼로 수서 죽일인 차지 내가 저 안 나 죽여놓고 나 죽으면 돼요
엄청난 죄를 저지든 그런 사람들을 국민과 국가에 엄청나 혜약을 끼친 사람들을 절대 사면에 줘서는 안 된다
정식으로
한 번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사실도 밝히지 않고 이런 친구들 섬에 해 주다 보니까 지금 상당한 시간이 걸렸는데도 재안한데도 지금도 뻔뻔하게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하잖아요
거짓을 얘기할 경우는 처벌한다고 하는 법이 있어야 됩니다
근데 거짓을 말해도 처벌되지 않는데 무슨 진상 규명이 되겠습니까
지난해 7월 국립대전 현충원
엄숙하고 화려한 의식 속에 현충원 장군 묘역에 안정되고 있다
누굴까
박준병
그는 1212 517 쿠데타를 주도한 신군부의 핵심 인물이었다
전두환 노태우에 이어 보안 사령관 자리에 올랐고 특히 1980년 당시 광주의 진압군으로 투입된 24단장을 지냈다
그는 광주 진압이 끝난 이후에도 승승장구했다 직권녀당의 사무총장을 세 분이라 맡았다
1212 군사발란 직후 축하 파티를 안 돼 기념촬영에 등장하는 신군부
분사발란 이후 신군부는 광주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무차별 살상했다
12일 동안 공식 집계된 민간인 사망자만 166명 부상자는 852명이다
이렇게 유혈진압 후 전두환 등 신군부는 그들만의 훈장 잔치를 버렸다
1980년 12월과 이드메인 1981년 4월 모두 101명이 훈포장을 받았다
개혐업무와 국가안부를 잘했다는 것이 훈장의 사유였다
이들 중에는 광주의 진압군으로 투입됐던 부대 지휘관도 다수 있었다
서운의 종류는 대부분 무궁 훈장 적과 싸워 전공을 세웠다는 의미다
광주시민을 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광주시민을 걸어가는 시민들 남녀 노소 불문하고 그냥 폭력을 행사하고
정말 잔인하게 학살했던 그런 자들이 훈장을 한 사람으로 받았다고 해보세요
어떻게 그걸 존중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훈장을 받은 게 정당한 것일까
취재진은 지난해 일부 신군부 인사들을 찾아 훈장을 받은 사유를 물었다
그러나 한결같이 답변을 회피했다
아니 나 그런 거 필요없어요 하지 말아요
내가 기가 어두워가지고 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네
선생님 그 일정이 어려우실 것 같으세요
좀 힘드실 것 같으세요
우리는 조금 달라졌을까
취재진은 지난주 신군부 핵심 인사의 집을 찾았다
이희성 개엄사령관과 정우용 특전사령관 등 5.18 당시 광주 진업을 주도했던 인사들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만날 수 없었다
바로 때 초대하자 배우 수준이실 거예요
2월 초쯤이요
역사적 가해자들은 언제쯤 참여와 반성을 할 수 있을까
최근 폐고록을 세성에 내놓은 전두환
그는 왜 진실을 왜곡하는 책을 냈을까
전 대통령이 저러는데요
5.18 관련해서 여쭤볼 수 있어 가지고
대한민국 가장 높은 자리에서
무소부리의 권력을 휘둘렀던 전두환
글을 지키고 있는 벽은 여전히 높았다
인터뷰 하실 의사가 없으시다라고요?
그대로만
의사가 없으시지
아 본인이?
알겠고요
여기 비서군이랑 이렇게 직접 만나고
제가 챙겨서 그 책 없나요?
없어요?
17년 동안 글을 보조하고 폐고록을 정리했다는
민정기 전 비서관과 전화통화가 이뤄졌다
네 민정기 교수님이십니까?
개홍군에 민간인 살상 이런 부분은 없었다
라는 입장이시잖아요
그런 부분들을 실제 여러 가지 증원들이나
기타 당시에 기록들이나 이런 것들을
정확하게 사실 확인을 다 하고 수신 건지
아니 거기 다
아니 그걸 꼼꼼히 포서요
꼼꼼히 다 읽었습니다
학생들이 개홍군을 그 당시 공수부대로
공격을 했잖아요
돌 가지고 전남 대학교 교문 앞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는 그 개홍군을
돌으로 투석을 해서 공격한 건 누구예요?
18일 날
아 이거 아니 지금
아니
시민들에 대한 고타나
여보세요
개홍들 어떻게 설명하실까요?
그거는 그 당시 현장에 있던
대대장이나 그 사람들한테 물어봐야지
아 그 현장의 주유관들의 책임입니까?
아니 아니 그럼 돌 던지고
저 구탈했다고 그러면 전 대통령이 광주 내려가서
구탈했습니까? 그 사람들을?
그러니까 그거는 현장에 있던 사람들한테 물어봐야지
전 대통령한테 그걸 물어요
더 이상 얘기할 거 없어요
5.18 역사는 덜이지만
진실을 향해 흘러왔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다
정부 차원의 연구와 기록이 여전히 부족하다
1989년 국회 광주 특위가 열렸지만
당시 여당이 반대로
결과 보고서 채택조차 무산됐다
정부 차원에서는 지난 2007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가 작성한
이 보고서가 유일하다
그러나 이 역시 조사 과정에 많은 한계가 있었다
2년 동안에 그 8개의
국지국지게 하는 사건들을
제대로 조사할 수밖에 없었고요
그리고 조사관 4명
저까지 4명이 이제
5.18이라고 하는
가다란 사건을 조사하는데
6개월, 7개월 이정도 조사하는데
자유 수준하는 데에도
사실은 시간이 많이 걸렸고
또 그런 과정에서 아무래도
저희는 이제
군내부의 자료라고 하는 측면
그것이 검증 과정을 통해서
더 확고하게 돼야 되는데
그거는 저희 집단에서는
다 확실하게 하지 못했다
라고 하는 한계도 있고요
5.18 37주년을 일주일 앞둔
지난 5월 10일에
출판 기념회가 열렸다
광주 학설의 진성을 처음으로 알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32년 만에 재출관된 곳이다
처음 이 초판이 나왔을 때가
85년인데요
벌써 32년 전이죠
자료를 아주 첫 포작전하듯이
숨겨가면서
출판에 이르게 됐는데
참 그때 당시에는 50정권
정말 살벌했던 시기였습니다
광주 학생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전부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기록을
민족과 역사 앞에
우리가 남겨야 된다
하는 그 무언의 책임감
이런 걸 가지고 있었죠
신문도, 방송도
완전 통제됐던 그 독재 시절
급하게 내녀라
표지 디자인도 만들지 못했지만
사회적 파장은 컸다
선풍적이었죠
그리고 책이 나오자마자
필덕서가 되고
바로 이 책을 읽으면서
살아남은 재의 슬픔
그걸 간직하게 됐고
살아남은 재의 슬픔이 바로 이 책을 통해서
널리 전파됐다고는 할까요
85년 출간 당시에
황석영 씨가 저자로 알려졌지만
계정판에는
두 명의 이름이 더 올랐다
숨겨져 있던 공동 집힐자
이재희 씨는
광주환쟁 당시 시위에 참여한
대학생이었다
사실 저는 30년이나 지난 사건을
되돌아본다는 거 정말 보기도 싫은 일이고
고통스러운 일이죠
그래서 정말 하고 싶지 않았었는데
광주에서는 도저히 더 이상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해가지고
시민들이 전체적으로 반발을 하고
화를 내고 해서
이 책을 다시 한번 써서
국민들에게 일키는 것이 중요하겠다
특히 잘 안 하는 세대들에게
광주에서 실제 저자
이재희 씨를 다시 만났다
따박따박
글씨를 써가며 정리해 놓은
육필노트
글을 비롯한
동료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광주의 기록이다
58환경에 관련된 자료를 모아서
후학들한테 전달을 해야 한다
사과 박수를 한 6개 박수
상당히 많은 양을 모았죠
32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나온
광주의 진실
진실을 찾는 작업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근데 우리가
그걸 정말 오랫동안 제대로 기억하고
그 정신을 앞으로 우리 삶을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가는
하나의 밑바탕으로 사용하려면
진실을 정확히 알아야 되는 거죠
그런데 58에 관해서
중요한 서류들이
문건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긴 하지만
완벽히 다 밝혀졌다고 볼 수 없어요
우리들이 잘 아는
가장 중요한 발포자가 누구냐 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고요
체주사삼 같은 경우는 오히려
특별위원회를 정부 차원에서 구성해서
늦게 했지만 그것을 어느 정도
정리를 했는데
58은 여러분 부분적으로
지속적으로 시행되어 왔지만
아직까지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국가보고서가 나와 있지 못하다
그래서 그것이 한 2연대 사이에 있어서
가장 상징적인 민주화운동 역사인데
이것을 보다 적극적으로
정리를 해야 한다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한편으로는
어떤 가해자들이
사람들이 자기가 무슨 일이라고 하면서도
그것이 무슨 일인지는 모르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어떤 진상 규명이라든지 일어나고
그리고 거기에 따라는
엄정한 처벌이 이루어질 때
그 사람들이 비롯해서
자기들이 인식하고 있지 못하던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자기들이 얼마나 잘못한 건지
또 자기들의 잘못된 판단과 행동으로 말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피해가 생긴지를
인식하게 되는데
그 엄정한 그런 심판 과정이
없다 보니까
그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들 자신에 대해서
착각하고 있고
잘못을 신어할지 모르고 있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정당하게 생각하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고요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이 원했던 건
정의와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였다
그리고
2017년 5월
대다수 국민은
광주 학살에 온전한 진실을 원한다
학살 책임자들이
지금까지 감춘 진상을
용확히 들쳐내고
그들에게 역사적 단죄가
엄중히 이루어지길 바란다
그래야만
5월의 광주
민주항쟁의 그 순고한 역사는
비로소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