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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
롤
롤
롤
롤
롤
8과 8 사이에 손으로 껴가지고 겨드랑이 안에 껴가지고 그러고 올라오는다고.
저희 안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건
가족들이 제 가족 같고 수중에 있는 아이들이 내 식구 같으니까 했던 거지.
애국잖아 영웅은 아니에요.
애들하고 승부가 복주됐어.
영웅은 애식이다.
허팝 치료야 내가.
그걸 어떻게 이, 절대로 안 Wait.
그 순간이 되었습니다.
한적한 주택가 길모툭이의 작은 꽃집.
남편은 바다 사나이의 다부진 체격 뒤에
야생화를 좋아하는 섬세한 마음을 품은 이었다.
그런 남편에게 아내는 꽃과 바다를
살아나는 방법을 하나씩 배웠는데
지금 꽃바다 속에 남편 김관홍 씨는 없다.
다 만족나서는 어떤 생각이 드세요?
꽃받고 좋아했으면 좋겠다.
어제 거울 받았거든요.
하나씩 넣어 드릴까 하고 사실은 어제 조금 받았어요.
원래는 안 넣어 드렸거든요.
공작소에서 만든 건데 새우로 리본이라
꽃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알고 같이 넣어 드리려고.
지난해 새로 꽃집을 연후로 하루하루는 바쁘게 흘러간다.
얘들아 니네 어디를 먹을까요?
여기.
지붕에 있대. 25마리가 더 날라왔대.
그러면 앞에가 100위 있어.
한창 부모 손끼리 필요한 초등학교 3남매의 간식을 챙기고
숙제를 도와주는 것도 오로옷이 엄마의 목.
그래도 잊지 않고 응원해주는 이들이 있어
지난 1년을 버텨왔다.
저희 홈페이지에 주도가 떨어지니까
여기다가 보내주신 것 같아요.
누가 모르신 거예요?
모르신 분이?
모르신 분이 일주일이 되었다고.
장난감이랑 비타민.
많은 분들이 잊지 않고 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3년 전 그날 남편을 말렸더라면 어땠을까?
잠수사만 500명이 있기 때문에
다 해결될 거라는 식으로 얘기를 했었거든요.
몇 분에서도 일격을 한 잠수사 500명을 추입하고 있습니다.
가서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데다가
방송에서는 500명이 왔다, 몇 백 명이 왔다 그러니까
당신이 안 들어가면 할 수 있다고 했더니
안 된다고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없다고
몇 명 안 될 거라고 그랬었거든요.
그래도 마음을 못 잡으니까 가라고 했죠.
지난 2014년 5월 중순.
김관홍 씨를 비롯한 민간 잠수사들은
한 달째 세월호 수중수색에 참여하고 있었다.
지금 치카라인이 아침에
배 고정시켜주기 잘못되어서 터졌습니다.
누구 핑계가 될 것 없이
일단 터진 거 다시 한번 치카,
다이버들이 바로 내려갈 수 있게
서로 다시 한번 설치해주는 겁니다.
해경 회군이 아닌 민간이신분의 이들은
수중교각, 학만시설 등 수중건설 분야에 종사하는
산업 잠수사들.
잠수 헬멧을 통해 물 위로부터 공기를 주입받는
이른바 표면 공급식 잠수를 한다.
안전한 잠수를 위해서는 바재선 위에서
공기 공급 호스를 잡아주는
이른바 텐더의 역할이 중요하다.
생명줄이라 부르는 공기 호스 덕분에
오랜 시간 더 깊이 잠수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세월호 선체 수색은
민간 잠수사가 돋았다시피 했다.
김관홍 잠수사는 B팀의 텐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세월호 침몰 일주일 후 맹골수도로 들어갔던
그에게 잠수를 하지 못할 사정이
생겼던 까달기다.
상승해서 올라와서 첸부에서 기절했어요.
아마 피로에 누적돼서 아마 산수에
아주 좀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 같아요.
올라와서 첸부에서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병원에서 한 달 동안
잠수를 금지시켜서
못 들어가고 있는데
바로 병원에서
태어나자마자 바로 바지로 돌아오고
지금 내일 팀장 있게 말씀해 줘서
내일부터는 다시 들어갈 수 있겠고요.
물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답답해
보근해서들도 소개 타거든요.
잠수 때문에 생기는 몸의 이상 신호에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
자기 몸 상할 줄 알면서도
왜 서둘러 돌아와야 했을까.
마치도 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빨리 끝내고 싶으니까
더
사보자들이
어느 정도 좀
유지한 사람들도 올리고 싶으니까
가족들한테
많이 망가진 모습 보여주고
보이지 않겠고요.
좀 있으면 수안이 더 올라가서
많이
상하니까 더 많이 상해요.
그전에 빨리
조금이라도 운전할 때
올려주고 싶으니까
제일 가서 갈 거예요.
세월호까지는 수심 48m
더구나 맹골수도는 물살 거칠고
물끼리 헝하기로 악명 높은 바다다.
민간 잠수사들은
잠수병과 피로에 시달렸다.
몸이 왜 이러는 거예요?
수압에
수압에
바다 밑바닥에 옆으로 놓은
거대한 여객선 안은 미로 같았고
배 안에 모든 것이 뒤섞여 떠다녔다.
자칫 공기 호스가 장애물에
엉키기라도 하면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상황.
그거 제거하려면
시랄면 얼마나 걸렸는데
그러면 지금 가장 급한
그 누가족들이 원하는 게
지금 보기 자리인데
그거 하루 이틀에
그게 다 제거 같아.
그냥 안 되지.
그만한 게.
완전히 요즘에는 다 알죠.
근데 그 텐션을 다
그 수압이랑 힘든 거예요.
지금 상황에서.
오늘도 벌써
아침에 오다가
우선 그쪽
그 가족이 원하는 위치부터
확인을 해달라고 해서
오전에 다이빙할 때 그쪽
진입요 확보
하러 들어갔었는데
일단 들어가기 전서부터
위험하니까
근데 그거 제거하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언제 위험해.
그 질화한테 차분하다니까
괜찮아요.
블랙홀처럼 빛을 삼켜버리는
심해에 어둠 또한 난관이었다.
랜턴을 달고 들어가도
시야는 20에서 40cm 정도.
잠수사는 시각을 포기해야 했다.
냄새가 나나?
감사합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소리가 다른데.
냄새 맡아본다고요?
냄새?
호흡을 들어가야 해서
옆에 물
호흡기로
간식이 스며들 수 있는 거예요.
손으로 더듬어서 하는 거예요.
최악의 환경 속에서
잠수의 기본도 지켜지지 않았다.
우리가 잠수했던 수심에서는
했던 수심은 48m에서는
1일 1에
15분 이내
하는 게 안전하다고요.
이제 거의 이상 넘어가면
항상 잠시병에 노출이 되는 거죠.
노출이 되는 거죠.
그러면 일반적으로
그때 당시 그러면
상황에 하루에 몇 번이나
어떻게 잠수장을 하셨어요?
하루에 그때 당시 첫창기에는
하루에 3번, 4번
많이 들어간 사람
5번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고
눈 감으면
깜깜한 그들이야.
아무것도
시야가 없어.
안에 내장제가
물을 먹게 되니까
계속
이제 무너져 내리는 거지.
그래서
나와 들어와서
한번
그게 붕괴되었고
간식이 빠져나온 적도 있어요.
심해에 가라앉은 침몰선에서
희생자를 끌어올리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뿐이었다.
기본적으로
이제 우리가
임양을 할 때는
안고가 안고
팔과 팔 사이에
손으로 껴가지고
겨드랑이 안에 껴가지고
그러고 올라온다고.
그러면 거의 얼굴이
막까지
바로 옆에 있었거든.
애교 얼굴이
보면서 올라오는 거지.
처음에
들어왔을 때
수색 중에
비계나 이불을 만졌을 때
산내에 놀랐는데
드디어
서고자를 찾았을 때
저도 모르게
담담해지더라고요.
그리고 마음이
나빴어요.
손으로 더듬어
찾아왔어요.
손으로 더듬어
찾아왔어요.
손으로 더듬어
찾아낸
실종자의 주검을
끌어안았던 기억은
화상 자국처럼
민간 잠수사의
가슴에
새겨졌다.
지금 3년이 넘게
흘렸잖아요.
그거
잊어지냐고
그런 말들을
많이 물어보는데
절대로 안 잊었대요.
트라우마라고
그러면서
그게 가끔 생각나는데
매 순간 생각나요.
그걸 어떻게
절대로 안 잊어요.
매 순간 생각나고
매 순간
누가하고 대화하고
다른 이야기하고 있고
다른 데 집중하고
있으면 생각이 안 나는데
또 혼자
그냥 있으면
그렇게 생각나요.
2014년
4월부터 7월까지
세월호 선내 진입해
수색 수습 작업을
펼친 민간 잠수사.
이들은
군경수색팀과 함께
292명의
세월호 희생자를
가족풍으로 돌려보냈다.
수색 과정에서
민간 잠수사가
사망하는
불의의 사고가 있었다.
당시 정부는
작업 현장 총괄 책임은
해경에 있다고
발표했다.
책임 부분에 있어서는
해경이 전체적으로
총괄 책임을
작업 현장을
지고 있기 때문에
석다려 뒤
목포 해안경찰서가
사고 책임자로
지목한 이는
해경이 아닌
민간 잠수사 공우영 씨.
잠수경력 40년에
최고 실력을 갖춘 그는
수색 기간 동안
잠수 감독관 역할을 했다.
검찰은 공실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했다.
고 이광욱 잠수사에게
잠수 작업을 지시 내리고
민간 잠수사 수색 작업을
지휘 통제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공잠수사가
돌아가신 분을
인솔했습니까?
아닙니다.
저희는 어떤
권한도 능력도 없었고
만약에
형님이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그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해경이 결국은
잠수도 호락하고
다 한 거죠.
책임자도
책임을 잡히는
해경이 일방적인
내용도 모르는 분들이
알지동 오다른 분들이
저에게 일방적인
강요와 지시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잠수사가
사망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공잠수사
그분에게 모든 책임을
지금 덮어 씌우기
하고 있는 거죠?
예, 그렇습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사망사고가
난 이후 누군가
책임을 지어야 된다는
그런 것 때문에
저희가
일단 쫓겨나고
우리 공우 형님을
형사,
창고인에서
피의자심으로
바꾼 다음에
저희한테 다시 들어오라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죠.
그걸 정부가 했습니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
왜 저희
민간 점사입니까?
저희는 거기
그 현장에
돈을 벌려고
간 게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자발적으로
저희 마음이
아파서 간 거지
돈을 벌려고
간 그런 현장이
아닙니다.
진짜 우리가
화가 났던 게
그거 있어요.
관우 형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화가 났던 게
그런 사람들은
다 진급을 해서
해군이나 해군에
그거 관련해서
일했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그거의
적절한 보상과
포상과
해경도 마찬가지
다 그렇게 됐어.
그런데 정작 우리는
우리는 뭐냐고
오히려
욕을 먹지는 않나
우영형처럼
엉뚱한 걸
뒤집어 씌워서
죄인으로
만들어놓지 않나
자기네
발병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우리가 다
붕괴를 했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같이
간호기가
그걸
전적으로 한 거에요.
간호기가
메스콤에
알지고
처음에
간호기가
메스콤에
알지기 부터
시작한 거지.
그 치민단체에
알지고
그런 거
그걸
간호기가 전적으로
했던 거죠.
그러면서
더
공개하게 됐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관홍 씨는
민간 잠수사의
대변인이었다.
자발적으로
나섰던
그들의
헌신과 노력을
알렸고
무능함을 증언했다.
어떤 재난에도
국민을 부르지 마십시오.
정부가
알아서 하셔야 됩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록
세월호 침몰의 진실은
떠오르지 못했다.
찾아주지 못한
미수습자 9명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만 커져갔다.
그리고 지난해 6월
김관홍 잠수사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대리운전을 하며
어렵게 생활하던
그가 남긴 한마디는
뒷리를
부탁한다.
그때가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활동을
해나가는데
가장 힘든
그런 시기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특조위가
조기
강제해산
당할 위기에
애처했고
배는
여름에 올라온다고
해수구에서
슬슬 흘렸지만
전혀 배는
인양대 가능성이 없고
계속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나쁜 소문들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그러면
그게 또
화나는 거죠.
김관홍 잠수사는
그러니까 또
맘앞하고 그랬죠.
관홍이는
이게
활동을 하면
할수록 더
이게
안 좋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아마 그런
상황이 오지 않았는가.
맨날 수채
죽을 것 같은데
나 죽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하냐고
막 하소연도 하고
그런 게 막 있었죠.
그거를
술 먹고
그런다고
되게 핀잔 줬죠.
그게 아니었는데
저는.
네.
그런 게 좀 아쉽죠.
지난 17일
고 김관홍 잠수사를
가슴에 묻은 이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관홍아
네 이름을 불러보는 게
너무
오랜만인 것 같다.
네가 뒷일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간지
벌써 1년이 지났다.
그 사이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어.
네가 떠난
1년 동안
공선 선언
무죄 판결이
확정되었고
박근혜는
탄핵되었고
너와 세월호 가족들의
노력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를 더 많이
알게 되었고
우리 잠사들을
억울함도
많이 알리게 되었다.
동료를 먼저 보내야
했던
민간 잠수사들
지난 3년 동안
그들 또한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잠수경력 29년의
황병주 씨는
더 이상
산업 잠수사이를
할 수 없게 됐다.
손에
바늘적이
엄청 많네.
예전에는
신장
투석할 정도는
아니었던 거예요?
아니었지.
예전에는
이제 세월호
작업하시면서
더 심해지신 거죠.
갑자기
지난 2015년 12월부터
일주일의 3차례
신장투석을
받아야 하는 처지
수색촉이
잠수병이 찾아왔지만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다.
무리했던
심해 잠수의 후유증은
고스란히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고압산소 치료센터가 있는
3천포의
잠수병 전문치료병원.
해산통보를 받은 직후
민간 잠수사들이
입원치료를 받은 곳이다.
당시 잠수사들은
목, 허리 디스크,
근육통증,
마비 증상 등을 호소했다.
잠수병 증상이었다.
잠수하는 도중에
흡수된 질소 성분이
갑자기
표만으로 상승하게 되는 경우에는
갑작스러운 질소의 발생이
공기방울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배에서
호흡에 의해서
방출되는 질소의 양보다도
그 관계를 초과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경우에는
혈액 속에서 바로 질소 방울 형태로서
떠다니게 되다가
혈관을 막는다든지
아니면
신체의 초직 부분을 막아가지고
여러가지 질병을 나타내게 되는 거죠.
우리가 드림하시는 공기에
78%는 질소.
평상시에는 호흡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출되지만
수압이 높아지는 물속에서는
패를 통해 나가지 못하고
혈액 속에 녹아 든다.
이때 수면류로 갑자기 상승하면
질소는 기포가 되어
혈관 곳곳을 막게 되는 것이다.
황경주 잠수사 등 8명은
장시간 심해 잠수를 했을 때 발생하는
이른바 골구회사 판정을 받았다.
말 그대로 뼈가 회사돼
인공관절 수술 외에는
치료법이 없다.
판정을 받으면
어떤 다음 일을 구할 때
지장이 만나고
지장이 많죠.
일단 업체에서 안 쓰지.
괜히 썼다가
자기네 산재가 물리는데
안 쓰지.
통상적으로
마지막 현장에서
산재 처리를 해줘요.
그런데 우리는
학정 방정을
구 현장에서 받았잖아요.
세월 현장에서 받았잖아요.
세월 현장이 끝나고 나서
골구회사랑 나오니까
그때 당시 김석균 해경청장이
왔어요 병원에.
와서 하는 말이
산재에 준한 처리를 해주겠다.
걱정하지 말아라.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지난 2월
민간 잠수사들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상태.
무혈성 괴사.
즉 골구회사를
부상 등급 판단 근거에서
제외한 것은 부당함으로
골구회사를 고려해서
부상 등급을 상향 조정해
제대로 치료받게 해달라는 취지다.
인간감사는 같은 경우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실 그런 부분이었던 거죠.
국가를
국가가 비어있는 공간에
우리가
애국심을 가지고 가서
일을 했던 것인데
그에 대해서
아주 막
입으로는 극찬을 하고
최선을 다해서
국가의 도리를 다하겠다고
해놓고
이후에 모든 절차에서는
일해서 안 되고
일해서 안 되고
일해서 안 되고
이거는 이렇게 해석하고
저렇게 해석하는 문제인 것 같은데
굳이
흡수한 해석을 통해서
계속
배제하는 형태로
나아가다 보니까
그런 상황에 내물리다 보니까
버림받았다
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죠.
고 김광영 잠수사가 떠난 뒤
세상에 바뀌었다.
1089일의 기다림 끝에
세월호도
무트로 나왔다.
배가 올라오면
당장 가서 보자고 했으니까
배가 올라오면
자기가 어디로 들어갔는지
이런 거 다 설명해 주겠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배가 올라오니까
김광영 잠수사가 더 많이 났어요.
살아 있었으면
바로 지금 목포에 가 있었을 것 같은데.
김탁환 작가는
민간 잠수사에 관한 소설을 썼다.
김광영이 들려준 이야기가
작품에 담겼다.
정작
김광영 씨는 책을 보지 못했다.
다음머신이 있어서
한 5달만
미래를 보셨다면
김광영 잠수사 6월에
돌아가셨는데
11월
11월
12월 정도로
우리가
촛불집회가 시작되고
이럴 때를
미리 알 수 있었다면
김광영 잠수사 그렇게
빨리 가진 않았을 건데
아쉬움이 있죠.
안타까움이 있고
그동안에
난이나 잠사가 일어났을 때
국가가 제대로 역할을 못 했고
그래서 그 역할을
몇몇 국민들이
그 역할을
짊어지게 되었고
그렇게 짊어진
국민 중에 한 사람이
인간홍 잠수사였던 것 같고요.
네.
다시
남은 이들의 시간이 흘러간다.
여기 있다.
혼자 갔다 올 수 있어?
같이 가.
신나게 재과점으로 들어선 아이는
케이크 진열대 앞에서
누구의 얼굴을 떠올리는 걸까.
케이크 왜 살려고 그러는 거야?
오늘 아빠 생신이야.
오늘 아빠 생신이야?
응.
다음에는
어디에서 뭐가 제일 먹고 싶어?
우유 케이크.
우유 케이크?
네.
근데 치즈 케이크 사는 거야?
왜?
아빠가 좋아할 수 있어.
아빠가 좋아했어?
왜 그 바다에 뛰어들었을까?
아이들이 자라서 그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안전하고 공평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였다고
그 대답을
우리 사회가 대신 해줄 차례다.
세월호 아이들을 품었던 그의 빈자리에는
슬픔이 아닌 희망이 놓여 있다.
